고난의 행군 4차 세미나 

  1차 94년 2월, 2차 94년 6월, 3차 95년 2월 개최했던 세미나가 97년 9월에서야 겨우 열리게 된 것은 그만큼 한반도 정세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물론, 1, 2, 3차 세미나가 개최된 시기, 심지어 4차 세미나도 정세가 좋아져서 열린 것은 아니었지만 이 시기 더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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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구글]


  우선 북한 자체의 상황이 안 좋았습니다. 1995년, 1996년 연이어 발생한 대홍수로 북한은 크게 휘청거렸습니다. 1995년 장마 기간 하루 평균 580mm 비가 내려 520만 명의 이재민이 나왔습니다. 이를 겨우 수습하는 과정에 다시 1996년에 하루 평균 600mm 비가 내려 327만 명의 이재민이 또 발생하였습니다. 

  전무후무했던 2년 연속 대홍수로 인해 북한의 많은 기반이 무너졌고 특히 농업부문은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이미 1990년대 들어와 국가 주도의 식량 배급에 어려움이 있었던 북한에 사형선고가 내려진 것과 같았고 대규모의 아사자와 탈북자가 넘쳤던 시기입니다.
  남북관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북한 대홍수 직후 남한에서 배로 쌀 2000톤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쌀을 실은 남한 배가 북한 청진항에 들어가다가 북한 군인들의 압력에 의해 태극기를 내리고 인공기를 걸게 함으로써 남한 여론이 악화되었습니다. 

  또한, 이듬해인 1996년 9월 북한 잠수함이 강릉에 침투한 사건, 오익제 천도교 교령의 월북, 북한 장승길 이집트 대사의 망명 등등으로 남북관계는 갈등과 대결로 치달았고 1997년 12월 남한 대통령선거 전에는 세미나 개최가 어려울 거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4년, 1995년 겨우 성사시킨 남북청년학생 만남의 동력을 살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세미나 주최 측의 결연한 의지와 쌓아왔던 신뢰로 인해 드디어 만 2년 7개월 만에 4번째 만남이 개최되었습니다. 

  4번째 만남은 과거 3차례의 만남을 통해 신뢰가 쌓여서 그랬는지 북한 청년학생들이 행사장에 들어오면서 먼저 도착한 남한 청년학생들을 보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악수하면서 “반갑습니다.” 하면서 반갑게 인사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지난번에 참석했던 남북 청년학생들끼리는 어렸을 때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보자마자 부둥켜안기도 하였습니다.
  세미나 진행은 역대 세미나와 비슷한 흐름으로 진행을 하였습니다. 조금 특별했던 것은 세미나 기간에 한민족의 명절인 추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26개국의 청년학생들이 참석했지만, 추석의 공감대가 있는 나라는 남한과 북한만이었기에 저녁 시간 후 남북한 청년학생들만 모여 통일 윷놀이와 민속놀이로 밤을 지내면서 4차 세미나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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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성이 이끌어 낸 남북청년대학생만의 만남

  남북청년학생의 역사적인 만남이 거듭할수록 세미나 주최 측은 북한당국으로부터 신뢰를 얻게 되었습니다. 세미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전 협의한 것을 최대한 지켜나갔다는 점, 세미나 기간 중 예측하지 못한 다양한 상황이 발생하였지만 상호 존중하는 자세를 갖고 문제를 풀어가려고 했던 점들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특히, 세미나 후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세미나가 끝날 때마다 카프는 남한 언론이나 다양한 매체에 인터뷰하였는데 남북통일에 대한 열망과 북한청년대학생과 북한당국을 배려하는 태도에 좋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카프의 진정성은 세미나의 획기적인 변화를 이끌어 냈습니다. 4차 세미나까지는 세계청년대학생 만남의 일부로서 남북청년대학생 만남이었는데 5차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남북청년대학생만의 세미나를 열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실 과거 4차례의 만남을 통해 남북청년대학생들의 입에서 세미나에 대해 공통으로 자주 나왔던 소원이 2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열리게 될 세미나 장소가 모스크바나 북경과 같은 제3국이 아닌 서울이나 평양이라면 좋겠다.”, “언어나 문화의 한계가 없는 남북청년대학생들만 만나서 깊이 있는 토론과 대화를 하고 싶다.”이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극심한 경제난인 ‘고난의 행군’을 걷고 있는 북한의 입장에서 남한의 청년대학생들이 평양에 오거나 북한의 청년대학생들이 서울에 간다는 것은 북한의 실체를 보여줘야 한다는 점에서 가능성은 제로였습니다. 남북청년대학생만의 만남 역시 북한으로서는 응하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남한청년대학생들과 직접적인 1:1 만남은 주변의 이목이 쏠리고 아무리 사상훈련이 잘되어 있다 하더라도 후유증이 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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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소원 2개 모두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드디어, 남북한만이 모이는 5차 세미나가 열린다는 소식에 대학가는 들썩이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의 전향적인 모습에 다들 놀랐고, 이러한 흐름을 잘 살리기 위해 카프는 5차 세미나가 열리기 전 남한 대학가에서 ‘통일 염원 엽서 전달식’과 ‘통일논문 현상공모’를 대규모로 진행하면서 홍보를 하였습니다. 
  이런 효과로 인해 카프와 학생운동권 학생들의 참석 신청이 줄을 이었고, 참석자가 확정된 후 우리노래 중창팀, 문화선전공연팀, 한국전통무용팀이 결성되어 준비했던 것도 5차 세미나만의 특징이었습니다.



  세미나 개회 2주 전 ‘서해교전’ 발발로 무기한 연기가 된 5차 세미나

  대학가는 6월이 되면 기말고사가 있고 하순부터 하계방학이 시작합니다. 세미나 참석자 확정은 5월에 끝났고, 주최 측은 그 전 세미나에 없었던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준비하면서 참석자들을 독려하였습니다. 새로 생긴 문화교류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토론도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았습니다. 기존 세미나는 남북한이 참여하는 분과가 3개 중의 1개였지만, 5차 세미나는 3개 분과 모두 준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날벼락이 떨어졌습니다. 세미나 개회 날짜(6월 28일) 2주일이 채 안 남은 6월 15일 아침 뉴스 속보에 “서해에서 남북한 함정 간 교전이 발발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분단 이후 최초 해상에서 남북 간의 교전이었기에 이 사건으로 모든 남북관계가 단절되었고 세미나 역시 무기한 연기가 되었습니다.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 이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소 떼 방문, 금강산 관광 개시 등으로 남북관계가 호전되는 과정에서 갑작스럽게 발생한 사건에 정부와 언론 모두가 허둥지둥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미나 주최 측은 7월 6일 북한당국과 세미나 개최에 대해 재협의를 하였고 7월 25일에 개최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5차 세미나 자체도 역사적 의의가 컸지만 서해교전 이후 모든 남북관계가 중단된 상황에서 처음으로 재개된 행사라는 점에서 언론의 주목을 크게 받았습니다. 그만큼 세미나를 잉태했던 참부모님과 김일성 주석 간의 회담, 4차례의 세미나를 통해 쌓은 상호 신뢰가 얼마나 깊었는지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관련 기사보기 : 1999.07.27자 MBC뉴스 방영 https://imnews.imbc.com/replay/1999/nwdesk/article/1784148_30729.html


  ‘민족의 자주성’ 그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고

  남북한 청년대학생만의 만남과 서해교전 이후 최초의 남북협력 사업이라는 점에서 언론사 간 취재 경쟁이 붙었습니다. 방송 3사, 3개 일간지, 3개 주간지가 동행 취재를 하였고, 그 당시 아직 20세기였지만 최첨단 인터넷 생중계를 할 정도로 세미나의 열기는 뜨거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작은 실수도 여과 없이 노출된다는 점에서 세미나 주최 측은 살얼음을 걷는 마음으로 진행하였습니다.
  특히, 세미나 이틀째 분과별 토론 시간은 전보다 주제가 구체적이어서 남북청년대학생들 사이에 의견이 부딪힐 가능성이 컸습니다. 대주제는 ‘통일 조국 창건을 위한 청년의 역할’이었고, 1분과 주제는 ‘민족 동질성 회복을 위한 이해 증진 방안’, 2분과 주제는 ‘한반도 평화 정착과 민족의 자주성’, 3분과 주제는 ‘남북 청년학생 단결과 연대를 통한 통일 문화 창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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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과 주제를 보면 알겠지만 가장 많은 집중을 받은 토론은 2 분과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분단 후 현재까지 시종일관 남북 간 극명하게 대립하는 단어가 바로 ‘민족의 자주성’이기 때문입니다. 해방 후 남한은 친일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주한미군 주둔을 비롯해 미국의 속국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민족의 자주성’이 없다는 북한의 주장은 2분 과에서도 제기될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토론은 얼마든지 다른 주장이 나올 수 있지만, 혈기왕성한 남북한 젊은이들이 자신이 배웠고 생각했던 것과 극명하게 다른 입장에 마주칠 때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질 수 있고, 반대로 남한 학생 중 사상교육이 덜 되었거나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학생운동권 학생이 갑자기 북한 주장에 동조하는 상황도 피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것은 1차적으로 토론을 진행하는 분과위원장의 역할이었고 문제의 2분과 위원장은 하필이면 그 당시 대학교 2학년 학생인 저였습니다. 5월에 카프 중앙 공직자로부터 분과위원장을 맡으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아무 생각 없이 승낙했었는데, 북경에 도착한 뒤에서야 심각성을 알아챘습니다.
  그날 저녁 시간에 중앙 공직자로부터 건네받은 2분과 북측 발표 자료를 읽어보니 ‘남조선 주둔 미군을 철수시켜 우리 민족에 대한 미국의 지배와 군사적 개입을 끝장내고’ 등 저부터 소화하기 힘든 내용의 글들이 A4 3장을 꽉 채웠습니다. 

  결국, 준비한 원고는 다 발표가 될 것이기에, 2분과 분위기를 좋게 진행하는 것은 포기하고 최악의 상황이 되지 않게 하자라는 목표를 갖고 다음 날 세미나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세미나 첫 순서는 모든 참석자가 한 장소에 모인 가운데 남한과 북한 대표 학생이 대주제 발표를 하였고 간단한 토론을 한 뒤, 3개 분과 중 자신이 원하는 분과로 이동하여 토론에 참여하였습니다. 남한의 김봉태 단장, 북한의 허혁필 단장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은 모두 2분과로 들어왔고 시작 전부터 무거운 공기가 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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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떨리는 마음으로 제 소개를 하고 바로 이어서 모두 일어나 옆 사람의 손을 잡고 ‘통일의 노래’를 부르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갑작스러운 저의 제안에 다들 어리둥절했지만, 저의 선창에 다 함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끝까지 부른 뒤 다시 앉았습니다. 확실히 노래가 효과가 있었던지 약간의 웃음소리와 참석자들의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남북 대표자가 발표하였고 바로 토론에 들어갔는데 이런 분위기는 시종일관 이어져갔습니다. 물론 민족의 자주성을 기준으로 볼 때 남한을 배제하고 미국과 협상하려는 북한의 ‘통미봉남(通美封南)’ 외교 행태에 대해 남한 학생들의 비판, 안보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 문화 등 미국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남한에 대한 북한 학생들의 비판이 오고 갈 때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기도 하였습니다.

  토론 끝에 북한 참석자들의 대표인 허혁필 단장은 “오늘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나이도 많고 지금까지의 통일 세미나에 많이 참석해 보았지만, 오늘같이 감동을 받았던 것은 처음이다. 서로 간의 완전한 합의를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통일을 위한 노력하는 일이기에 정말 뜻깊은 시간이었다. 우리는 북과 남의 대표로서 이 세미나에 참석한 것이 아니라 통일을 염원하는 청년학생들의 대표로서 참석한 것이기에 너무 정치적 문제에 봉착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하나의 국가를 지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민족의 자주성은 그렇기에 너무나 중요하다.”라는 소감을 밝혔습니다.



  통일의 밧줄을 당겨라

  토론 다음 날 세미나 장소 근처 운동장에서 ‘통일맞이 체육 한마당’이 열렸습니다. 남북 참가자들이 섞인 ‘평화’와 ‘통일’ 2개 팀이 축구, 피구, 줄다리기하면서 더욱 친해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남과 북 단장들이 통일의 메시지를 축구공에 적고 그 공으로 시축을 하면서 시작된 축구 경기는 신기하게도 3:3 무승부가 되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작전을 세우는데 같은 팀인 북한 학생이 저한테 “저쪽에 뛰는 성일이는 다리가 빨라. 공을 치고 달릴 때 훈일이 니가 그냥 다리를 걸어. 팔꿈치로 때리던가 해서 어떻게든 우리가 이겨야지.”라고 지시를 하였고 “그래요? 성일이 형이 뭐라고 하면 어떻게 해요?” 물으니, “괜찮아. 전반전에 나도 당했으니 그거로 내가 뭐라고 따질게.” 

  이렇듯 체육 한마당은 남과 북이 아니라 평화와 통일이 함께 하는 한마당으로 열기가 더해졌습니다. 공을 차면서, 공을 던지면서, 밧줄을 당기면서, 함께 얼싸안고 남한의 응원가, 북한의 응원가를 따라 부르며 통일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녁에는 남북 혼합 8개 팀으로 나눠 토너먼트로 통일 윷놀이 한마당을 하였고, 남북학생 의형제 결연식, 남북 노래 배우는 시간, 북경 관광 등등을 통해 더욱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특히, 관광시간은 남북청년대학생들이 가장 편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이어서 삼삼오오 다양하고 진솔한 얘기를 많이 나눌 수 있었습니다. 실내에 있을 때 보다 서로에 대한 시선이나 움직임이 자유로운 시간이었기에 앞으로의 꿈, 외모나 집안의 고민, 친구 관계의 어려움 등 이야기꽃이 피웠습니다. 
  밤이 되면 서로의 호텔 방을 찾아가 못다 한 얘기를 하거나 남한 여학생들은 북한 여학생 저고리를 입어보기도 하고, 남북한 학생들이 즐겨 하는 게임도 서로 가르쳐주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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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미나를 거꾸로 돌릴 뻔했던 사건

  3일째 되던 날 갑작스러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날도 서로 친해진 남북한 청년대학생들이 호텔 방에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북한청년대학생들이 약속이나 한 듯 호텔 방을 나가 어디론가 이동하였습니다. 
  남한청년대학생들은 “갑자기 무슨 일이지? 북한에 큰일이 났나?” 이렇게 생각을 하고 각자 걱정을 하였는데, 다음날 조금 무거운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예정된 일정이 진행되어 다행이었습니다.
  세미나가 끝나고 남한에 돌아와서야 저간의 사정을 듣게 되었고 깜짝 놀랐습니다. 내용인즉슨 대학교 학보사 편집장인 남한의 참석자가 어깨에 메는 작은 가방에 카세트 녹음기를 넣고 그날 밤 호텔 방의 남북한 청년대학생들의 대화를 무단으로 녹음하다가 북한 대학생에게 걸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카세트테이프 한 면이 다 돌아가면 자동으로 다른 한 면을 돌리는 ‘오토리버스(Auto Reverse)’ 기능이 최첨단 기술이었는데, 90분 녹음이 다 되어 자동으로 다른 면으로 바뀌는 순간에 ‘찰칵’ 소리가 들리는 것을 북한 대학생이 알아채어 그 편집장 학생에게 따지다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북한 대표단은 세미나 남은 일정을 중단하고 바로 다음 날 북한으로 귀국하는 것까지 심각하게 고려하였지만, 세미나 주최 측에서 인내심을 갖고 설득하여 파행까지 가지 않았습니다. 
  문제를 일으킨 학생은 세미나 주최 측 관련 카프 학생이 아닌 학생운동권 계열의 학생이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점, 세미나 주최 측이 빠르고 투명하게 수습을 한 점, 기존의 세미나를 통한 신뢰 관계가 깊고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5차 세미나 역시 잘 진행이 되었던 점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결과였습니다.

  이 외에도 작은 오해들로 인해 약간의 마찰이 있었지만, 남북 모두 슬기롭게 잘 헤쳐나가 마지막 날 작별의 시간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눈물을 흘리며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였습니다. 먼저 떠나는 북한 청년대학생들은 버스 창문을 열어 손을 내밀고, 남한청년대학생들은 그 손을 잡으면서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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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남북정상회담의 불쏘시개

  5차 세미나에 참석한 남한청년대학생들은 다양한 언론매체에서 자신의 이름과 얼굴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세미나 5일간 언론이 함께 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크게 다루어질지 몰랐던 것입니다. 
  저 역시 그 당시 대학생들이 가장 많이 보는 주간지인 ‘한겨레 21’에 인터뷰가 나오면서 전자공학과 같은 과 친구들이 ‘전공과 가장 거리가 먼 친구’로 고등학교 친구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안기부 공작원으로 취직’ 등등 우스갯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1999년 6월 15일 서해교전이 발생했을 때 그 후 한 달 뒤 남북청년대학생들이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사람들이 거의 없었듯이, 5차 세미나 이후 1년도 되지 않아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을 하리라 예상했던 사람들도 별로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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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1999.08.12. 270호]

  5차 세미나는 아주 작게는 남북통일에 전혀 관심 없는 한 대학생의 인생을 전환시켰을 뿐만 아니라 꺼져가는 남북관계의 불씨를 다시 지피는 불쏘시개로서, 분단 역사상 최초로 남북 정상이 만날 수 있는 남한의 여론을 움직이는 역사적 책임을 다하였습니다. 
전무후무했던 5차례 세미나의 전후좌우는 다음 화에 공개하니 많은 기대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