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이란 이름

붉나무란 이름 들어보셨습니까?
붉나무는 옻나무과에 속합니다.
그러나 독성은 거의 없습니다.
단풍이 붉게 물든다고 해서 ‘붉나무’라 이름 지었다 하나 옛부터 ‘붉’은 ‘밝’과 같아서 밝음, 빛, 태양을 뜻하기에 그런 뜻이 내포되어 있는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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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잎이 붉어 붉나무, 배달민족을 잉태한 그 붉음이 햇살에 찬란하다. 2019.11.4 이범석 作>


  '오배자'라는 것
잎을 한번 볼까요?
붉나무는 잎의 형태가 독특합니다. 잎은 마주나는데 잎과 잎 사이의 가지를 따라 또 다른 잎이 길게 달려 있습니다. 마치 잠자리 날개와 같습니다.
자세히 보세요. 좌우가 거의 일치하는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게다가 옆으로 펼쳐진 잎과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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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에 나온 잎의 날개, 다른 나무와 구별된다. 발전의 과정으로 보여진다. 2018.5.20.>

 
이것은 원래 넓고 큰 잎들이었는데 손상을 당하거나 동물들에게 먹혔을 때 막대한 피해를 입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면적을 분리함으로써 생태와 환경에 효율적으로 적응해 나가는 과정으로 보여집니다. 대개의 나뭇잎들이 그렇듯 말이죠.

그런데 말이죠. 이 나무에만 자라는 진딧물 면충이 즙을 빠는 자극을 주면 붉나무는 이들이 집을 필요로 해서 보내는 신호로 인식하고 사랑방을 만들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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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날개 자리에 생기는 진딧물의 보금자리 ‘오배자’. 귀중한 약재요 염료의 재료다. 2019.9.2 이범석 作>
 

동물의 귀나 버섯 모양으로 만드는데 이것을 보금자리로 한 진딧물은 수정을 하지 않고 암컷만으로 개체가 늘어나는 단위생식을 반복하여 약 1만 마리 정도로 늘어나게 되고, 비례하여 벌레집도 점점 커집니다. 그것이 다섯배나 커진다고 하여 오배자(五倍子)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붉나무는 자신의 몸의 일부를 양식으로 내어주고 집까지 지어주어 비록 동종은 아니더라도 안전하게 자녀를 번식하도록 도와주는 참사랑의 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오배자는 참 쓸모가 많습니다.
오배자는 탄닌 성분이 70%에 이르는 우수한 한약재로서 항세포의 전이를 막고 폐질환, 아토피, 이질과 만성 설사에 탁월한 기능을 합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유일한 천연의 동물성 염료로서 잉크의 원료와 새치염색제로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단지 벌레집으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이 인간에게 이토록 유용할 수 있다니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숨겨놓은 창조의 숨결은 오묘합니다.



  암수가 다른 꽃

붉나무는 꽃이 매우 작습니다. 암수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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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나무 수꽃, 암술은 퇴화하여 형체가 거의 없으며 색도 거의 흰 미색이다. 2018.9.11. 이범석 作>


더위가 무르익는 7~8월 경 총상으로 피어나지만 꽃대의 축이 여러 갈래의 가지로 뻗어 전체적으로는 원추형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멀리서 보면 대략의 하이얀 꽃송이로만 보이는데 자잘한 꽃이 잘 어우러져 은은한 멋이 일품입니다.
수꽃은 하얀 꽃잎에 연노란 수술 5개가 야간 경기장의 라이트처럼 솟아 있지만 암꽃은 퇴화한 수술을 달고 3개의 암술이 수정을 하기 위해 노란 화포와 빨간 씨방으로  알록달록하게 치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곤충이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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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나무 암꽃-수꽃과 달리 노랑과 빨강색으로 치장하고 벌나비를 유혹. 풍뎅이 한 마리 날아와서 꿀을 드신다. 2018.9.5. 이범석 作>


꽃 속에는 달콤한 꿀을 저장해두어 벌과 나비의 밀원이 됩니다. 붉나무 꿀은 맑고 향기가 좋고 약효가 높은 녹색꿀이라 일컫는데, 양이 많지 않아서 귀한 대접을 받습니다.


  생명의 소금이 주렁주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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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조를 띠며 열매가 영글어갈 즈음부터 과육에 소금젤리가 맺히기 시작한다. 2018.9.30>
 

8월 하순에는 꽃의 수만큼이나 열매도 엄청나게 많이 달립니다. 열매의 무게 때문에 포도송이 같은 꽃대는 아래로 쳐집니다.

열매는 녹색일 때부터 소금이 범벅처럼 덧입혀지고 점차 홍조를 띠며 갈색으로 익어갑니다. 과육에 하얀 젤리가 덕지덕지 들러붙습니다. 이것이 곧 천연 소금입니다.
나트륨이 아닌 칼륨염(KCl)입니다. 여기에 사과산이 곁들여져서 짠맛과 신맛이 나는 매력을 뽐냅니다. 이른바 ‘신짠’입니다.
먹어보니 아주 감칠 맛 나는 짠맛이었습니다.
뿌리와 껍질, 잎 등 전체가 짠맛을 내는 소금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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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의 소금범벅은 사과향의 신맛과 짠맛이 나는 이상적인 소금이다. 개미 한 마리 노닌다. 2019.9.24 이범석 作>
 

그런데 어찌하여 일반적으로 과일이나 열매는 과육 안에 맛을 함유하고 있어서 동물들을 유혹하는데 이 붉나무 만은 과육 밖으로 소금 결정을 덧씌우게 되었을까요?
자신의 열매를 동물들이 먹어서 멀리멀리 퍼트리게 하려는 생존전략임은 분명합니다만, 다른 과일은 이렇지 않은데 유독 이것만은 이래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 어느 연구 자료에서도 찾아본 적이 없으니 붉나무의 언어를 배워서 직접 물어봐야 하겠습니다.

아무튼 보통의 소금은 나트륨(NA) 결정이지만 붉나무 소금은 중금속의 독성이 제거된 가장 이상적인 소금이라고 합니다. 천일염의 1/4정도의 짠맛이지만 소금이 귀하던 옛날에는 붉나무 소금을 취하였고, 이를 간수로 하여 천하일품의 두부도 만들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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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부는 날개 달린 동물이 먹지만 일부는 땅으로 내려 다른 동물이 취하도록 한다. 2019.11.4 이범석 作>
 

삼국사기는 가장 출세한 소금장수로 15대 미천왕(300~336년)이 된 고구려 봉상왕의 조카 乙弗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가하면, 로마시대에는 소금이 군인들의 봉급이었다고 합니다.
영어 ‘Salt’는 'Salary'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태아의 자궁은 0.9%의 소금물인 양수로 채워져 있습니다.
태아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새 생명을 보호하는 궁전이 바로 소금물입니다.
성경에서도 빛과 대등하게 소금을 칭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부정한 것을 물리치는 거룩한 의식의 성염으로 대접받고 있으니 요즘 아무리 흔해졌다고 해도 그 소중함은 인류역사에서 최고의 위치에 올라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소금은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라 ‘생명소’이기 때문입니다.



  버릴 것 하나 없는 천금목

상처받고 허약한 동물들은 붉나무 껍질을 벗기고 거기서 나오는 하얀 진액을 발라 치유를 한다고 합니다. 화상을 입은 사람이 흰 진을 바르면 흉터가 남지 않고 잘 낫는다고 합니다.
꿀과 소금이 동시에 생산되는 나무, 나무에서 동물성 염료를 생산하고 인간과 동물의 아픔을 치료해주는 약재가 생산되는 나무는 흔치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쓸모가 많다보니 붉나무를 옛날에는 천금목(千金木)이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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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나무 열매는 무게로 인해 수수처럼 아래로 처진다. 2019.11.4 이범석 作>
 

그런데 산중 깊숙한 곳에서 자라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을 길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너무 흔해서 관상수로도 대접받지도 못합니다. 저절로 잘 자라니까요. 아름답다거나 고목이 아니라서 문학이나 예술작품으로 다루지도 않았을 정도로 무심히 보아 넘기던 나무였습니다.
사람들이 파괴한 현장에는 맨 처음 풀들이 자라고 다음으로 나무들이 자라나는데 그 중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붉나무입니다. 생명력이 강한 붉나무는 거친 생태환경을 다시 살려내고는 다른 나무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자기 갈 길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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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나무에 얽매어진 칡을 분리해 보았더니 상처가 깊다. 성장통이 심했을 듯, 그래서 꽃눈은 일그러진 웃음일까? 2020.1.9 이범석 作>


길가에 자라다 보니 덩굴류의 엉겨 붙음도 감수해야 합니다.
칡은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제가 관찰한 많은 나무들이 칡과 어울려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린 나무일 때부터 타고 오른 칡이 살을 파고들어 옥죄이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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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굵은 줄기의 칡은 아예 분리조차 되지 않는 한 몸이 되었다. 얼크러진 ‘만수산 드렁칡’이 풍진한 세상을 그려낸다. 2020.1.9 이범석 作>
 
 
가지나 줄기도 곧게 자라기에 산길을 안내하는 작대기로, 나무가 가벼워서 무른 풀을 베어내는 호미자루로, 소죽을 끓이는 불쏘시개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불가에서는 금강장(金剛杖)이라고 불렀는데 수행을 할 때 일체의 번뇌를 물리쳐주는 영험한 나무라 하여 스님들의 지팡이로 사랑받았다고 합니다. 또, 일본에서는 불단에 이 나무의 진액을 바르는 풍속이 있는데 일본어로는 붉나무를 ‘칠한다’는 뜻의 ‘누루데(ぬるで)’라고 합니다.

보통은 나무의 수명이 100년을 넘고 천년을 가지만 붉나무는 기껏해야 10년 정도 밖에 살지를 못합니다. 당연히 커다란 고목으로 자라지도 못합니다. 그러기에 텃세도 부리지 않고 열심히 살다가 모든 것을 내어주고 다시 척박한 땅을 향해 떠나갑니다.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는 저 겨울눈을 보시죠.
보는 각도에 따라 이미지가 다르다 해도 해맑은 진심의 미소가 느껴집니다. 봄이면 새로 피어날 겨울눈과 그 주위를 감싼 지난해의 잎 자국에는 물과 양분이 오르내리던 생명선이 흔적처럼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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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봄에 피어날 겨울눈이 주변을 둘러싼 지난해의 잎자국과 조화를 이루어 마치 동물의 다양한 얼굴 표정같다.
둘레의 점점은 물관과 체관의 흔적이다. 2019.1.9 이범석 作>

 
 
조선시대에 소나무에게는 귀족의 품계를 내렸고 현재도 수형이 아름답고 오래산 나무에게는 ‘천연기념물’이라는 호칭이 부여됩니다. 오염된 길가에 자랄지라도 가장 순수한 흰 소금을 내려주는 붉나무는 그 이상의 대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나무로 여겨집니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황금-소금-지금, 3금(金)의 하나인 소금을 선사하는 붉나무는 이렇듯 소중하지만 짧고 굵게 살다 떠납니다. 꽃말은 신앙.

 
붉나무는 절대자가 내려주는 생명의 선물을 지상에 전해주는 메신저요, ‘하늘이 보낸 특사(特使)’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