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저마다 피는 시간이 다르다. 
하루 종일 또는 며칠 동안 화려함을 자랑하는 것도 있고, 단 몇 시간만 얼굴을 드러내고는 것도 있다.
이 계절에 피는 꽃 중 시간을 의미하는 명칭으로 불리우는 꽃들이 있다. 피어있는 시간을 이으면 하루가 되는 꽃이 있다.
나팔꽃과 채송화, 분꽃과 달맞이꽃이 그렇다.

  새벽에 피는 ‘나팔꽃’ (Morning Glory)
나팔꽃의 영어 일반명은 Morning Glory. 아침의 영광이다. 
꽃말인 ‘기쁜 소식’과 절묘한 짝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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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자양분 삼아 핀 나팔꽃이 유홍초와 기쁜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2018.9.12. 이범석 作)


막 세수를 마친 미소로 논밭에 나가시는 촌노와 굿모닝!, 첫인사를 나누던 꽃이다. 집 앞 나무 울타리를 타고 올라 이슬 맞고 피어있는 보라색 나팔꽃을 보며 여름방학이 끝나감을 짐작하곤 했다.
나팔꽃은 해진 후 꽃망울이 열리기 시작하여 가장 경건한 시간인 새벽 4시쯤 핀다. 나팔꽃을 피우는 힘은 햇빛이 아니라 어둠이다. 그래서 고난을 이긴 꽃으로 여긴다.
성에 갇힌 남편이 보고 싶어 담을 타고 올라갔다는 전설이 아련한 나팔 덩굴은 서서히 일어나는 동녘의 기운을 받아 중력을 거스르며 하늘로 향해 팔을 뻗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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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소식을 전하는 나팔이 동녘을 바라보며 아침의 영광을 노래한다. 2020.9.14. 이범석 作)
 

아침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천사장의 나팔소리로 천지는 밝아온다. 
시인은 노래한다.

 
‘이슬 젖어 창 앞에 청초히 찾아오니, 묻노니, 아가씨는 달에서 온 선녀인가?

 

  11시에 피는 채송화(菜松花) (Eleven O'clock Flower)
나팔꽃이 꽃잎을 접으면 채송화가 핀다. 11시경 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방글라데시에서는 Time Flower, 인도에서는 9O'clock, 베트남에선 10 O'clock Flower라고 하니 동서양 모두 시간차를 반영하여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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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뙤약볕에 피었다 지는 채송화는 그만큼 삶도 강렬하다. 2020.8.17. 이범석 作)


어려서부터 익히 보아온 탓에 우리 꽃인가 싶으나 태양열 뜨거운 남미가 원산지다. 한여름 뙤약볕에 피어나 오후 2시가 되면 꽃잎을 닫는다. 
꽃의 수명이 길어야 서너 시간이다. 그래서 꽃말이 ‘가련’일까?
솔잎을 닮은 다육식물처럼 강한 햇빛을 견디기 위해 툭툭한 잎 안에 수분을 잔뜩 보유한다. 그래서 菜松花다. 일본에서도 'マツバボタン'(松葉牡丹 송엽모란)이다. ‘이끼 장미’(Rose moss)라고도 한다. 꽃이 장미처럼 아름답다.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땅꽃, 앉은뱅이 꽃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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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간에 결실을 맺는다. 보석함의 뚜껑을 열어 찬란한 삶을 영원으로 이어준다. 2020.8.17. 이범석 作)


장독대나 담장 아래서 봉숭아와 단짝을 이룬 채송화는 엄마가 생각나는 꽃이다. 너무도 오래 꿇어 앉아있었나, 앉은뱅이의 아름다움에 당찬 내 눈빛 이미 허물어졌다. 현기증 올라오며 옛 노래 아스라이 들려온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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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 두 마리가 닫히는 꽃잎 안을 파고들며 꿀을 빨아댄다. 2020.8.6. 이범석 作)


누구보다 강렬하게 한순간을 살다 가지만 결코 허망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유혹을 이기지 못한 벌들이 분주히 오갔다. 씨는 캡슐 안에 보관한다. 영글어가면 뚜껑을 열어 보석같이 반짝이는 씨앗을 내보낸다.
농부가 낮잠에 취한 햇살 부신 대낮에 꽃잎을 접었으나 누구보다 강렬하게 살았다. 그 시간을 잇는 또 다른 주자가 안으로 햇살을 머금고 대기한다.


  오후 4시에 피는 분(粉)꽃 (Four o'clock flower)
분꽃이다. 단 낮잠에서 일어난 농부가 다시 밀짚모자에 어깨에 삽 걸치고 논밭을 둘러볼 때 피기 시작한다. 
일단 개화를 시작하면 그 속도가 빠른 편이다.
남미의 안데스산맥에서 이 땅까지 날아와 정착한 여름꽃이다. 다음날 오전에 진다. 콜로라도에서 약용으로 기르며 ‘4시꽃’이라 했으니 우리 시간으로 5~6시경에 분주히 꽃을 피운다.
곧 해가 사위어질 것이므로 어머니들은 딸에게 쌀을 안치라고 했다. 일터에서 돌아와 곧 밥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위에 흘린 땀을 등목으로 씻어내고 마루에 앉아 저녁상을 마주할 때 앞마당의 방금 핀 분꽃이 피로를 달래 준다.
아즈텍 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옛 여인들이 ‘분 바르던’ 꽃이라 해서 분꽃이다. 
까만 씨앗 속은 하얀 분으로 가득하다. 이걸 모아 그을린 얼굴을 치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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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꽃을 피우지 않은 분꽃 봉오리가 태양열을 안으로 모으고 있다. 2020.7.31. 이범석 作)


봉숭아로 손톱 물들이고, 분꽃 씨앗 가루로 미백을 하면 우리 엄마는 최상의 미인이 된다. 여자애들은 꽃목걸이 하며 놀기도 했다. 화단이나 장독대 옆에 맨드라미, 채송화, 봉선화, 나팔꽃과 함께 세트를 이루던 꽃이다.
분꽃은 특이한 생태의 특성을 지닌다. 
멘델의 유전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우열의 법칙이나 분리, 또는 독립의 법칙에서 벗어난다. 불완전 유전인 중간유전을 한다. 
그래서 한줄기에서도 다른 색이 핀다. 짐작 어렵게 색이 섞이며 자유분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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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기의 꽃인데 색이 다르고 섞인다. 멘델유전법칙으론 설명이 어렵다. 2020.8.12. 이범석 作)
 

분꽃의 눈뜸이 사람의 잠자는 시간과 상반됨은 별을 흉내 내고자 함이었을까?
별은 하늘의 꽃, 분꽃은 땅 위의 별. 
별과 꽃이 하나임은 태초의 약속이었을지도 모른다.


  저녁에 피는 달맞이꽃(月見草, Evening Primrose)
‘기다림’이 꽃말인 달맞이꽃은 저녁을 마친 노곤한 농부가 등 눕히는 밤에 핀다. 남미 칠레가 원산인데, 해방 무렵에 많이 퍼졌다 하여 ‘해방초’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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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꽃은 오늘 결실이 되고 달빛의 축하를 받으며 다시 새 꽃을 피워 올린다. 2018.8.22. 이범석 作)
 

달 없는 밤에도 행여나 달이 나올까 기다리며 외로이 꽃을 피운다는 ‘달맞이꽃’. 서양 이름보다 훨씬 아름답다. 화단으로 옮겨지는 영광을 얻지는 못해도 사람의 마을에서 아름다운 月下香을 내뿜는 것이 기특하다. 

 
[크기변환]LBS_8894-1- 암술을 포스트로 수술가루들이 실로이어져 만국기 펄럭인다.-18.7.10.jpg
(막 피어난 달맞이꽃. 암술을 가운데 두고 수술이 전봇대처럼 서서 나방을 기다린다. 향기가 일품이다. 2018.8.20. 이범석 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라.’ 
 


‘하루’의 창조가 달맞이꽃의 피고 지는 시간과 어쩜 그리도 똑같을까. 
그가 함유한 감마리놀렌산은 모유에만 있는 성분이라니 창조와 관련된 것일까? 한여름 밤, 들녘에선 여기저기 꽃터지는 소리로 시끄럽다.
순간적으로 개화를 한다. 깜짝 놀랄 정도로 ‘뽁’하고 터진다. 모기에게 피를 보시할 인내가 없으면 그 순간을 놓친다. 
더 늦기 전에 생명의 소리를 들어보시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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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듯 천정궁을 바라보며 핀 달맞이꽃. 꽃말은 ‘기다림’. 2018.8.6. 이범석 作)


온 겨울을 푸르게 버티어낸 생명력은 가히 타 식물을 능가한다. 
게다가 그렇게 느긋할 수 있을까? 보통의 로제트 식물이 봄에 서둘러 꽃을 피우는 반면, 달맞이꽃은 초여름이 되어서야 피기 시작하고 늦가을까지 핀다. 
한줄기에서 하루에 피우는 수효는 고작 2~3개, 대신 오랫동안 피고 진다. 
결실을 차곡차곡 쌓으며 등줄기를 곧추세워 하늘을 향해 꽃을 피워 올리는 절제와 품위는 본받을만하다.


‘오늘, 하루’의 의미

나팔꽃-채송화-분꽃-달맞이꽃으로 이어진 ‘하루’라는 시간 속에서 ‘오늘’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카르페디엠 carpe diem  
'오늘을 즐기라.’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나온 대사로 유명해졌다.


 
‘아까운 시간은 지나가고 있다오, 오늘을 잡으시오’


로마 호라티우스의 시를 인용했다.

인간 최고의 발명인 시간은 하늘과 땅의 결합으로 생겨났다. 
켜켜히 쌓인 시간이 역사를 만들고 축적된 힘으로 변화를 이끈다. 
4차원으로 인식되는 시간은 개념상 이전보다 빨라진 듯하다. ‘보름달 뜰 때쯤 물레방앗간에서 만나자’던 약속은 이제 문장 속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분명한 것은 ‘오늘은 우리가 어제 그토록 기다리던 날’이고 ‘내일의 과거’라는 것이다. 천년이 응축된 하루를 살 수도 있고, 멍 때리며 지내는 시간이 때론 가치가 있다. 의미가 부여된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이면 된다.

살갗에 스치는 바람의 느낌이 다르다. 
벌써 9월도 중순이다. 
들녘의 벼 이삭도 하루가 다르게 색이 변한다.
내게 주어진 약속의 시간은 따로 없다. 그토록 기다리던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시간의 의미’를 ‘의미의 시간’으로 태엽을 감으면서 희망의 오르골을 연주하는 하루가 되길,,,,,,,,,
오늘, 꽃을 보며 생각한다.